이정현이 '바꿔 바꿔'를 열창하는 모습을 TV로 보면서 약간의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요즘 가수들이 노래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의 머리 속에 있는 대중음악은 송창식, 조영남, 조용필에서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저에게 신세대의 노래 부르는 모습이 충격적이었다는 건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구시대의 노래 공연은 청각적 즐거움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세대의 노래 무대는 청각과 함께 시각적 요소가 중요했습니다. 화면의 움직임도 빨랐고 무대 전체의 모습이 마치 컴퓨터 게임의 화면을 보는 듯 했습니다. 땀을 흘리며 무대 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백 댄서들의 춤이 얼마나 신바람 나든지….

몇 주 후에 모교회의 음악 예배에 말씀을 부탁 받아 갔었습니다. 그 교회는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공연했습니다. 백여 명의 성가 합창단과 30여명의 오케스트라로 반주를 한 꽤 수준 높은 음악 예배였습니다. 저도 70년대에 열심히 지휘한 적이 있는 오라토리오였기 때문에 흥미를 갖고 끝까지 참석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자꾸만 졸렸습니다. 몇 번을 졸다가 나중에는 창피한 생각이 들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보면서 이정현의 노래와 하이든의 노래를 생각했습니다.

이정현의 노래는 늦은 밤 느슨해진 제 마음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이든의 음악은 말똥말똥했던 정신을 점점 졸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래도 내가 클래식 음악을 오랫동안 공부한 사람인데 어째 그럴 수가 있는가?" 저는 자신을 자책하다가 '나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이든은 아무리 좋아도 하이든 시대의 사람들만큼 좋을 수는 없습니다. 하이든의 음악은 흰 가발 쓰고 마차 타고 다니던 시대에 더 어울리는 음악입니다. 고려청자는 아무리 좋아도 고려인들의 식생활에 어울리는 그릇입니다. 현대는 스텐레스와 아름다운 유리 그릇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인간의 문화는 마치 물과 같은 것입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문화는 박물관에나 존재합니다. 현대 예배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적당한 문화를 사용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변하지 않으면 썩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9번에 걸쳐서 '새노래'로 찬양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