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찬양 번역, 우리말 아프게 해요  
국내CCM곡의 오역을 짚어봅니다  


인간의 교만과 악행으로 결국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 이로 인해 서울 종로 거리의 수많은 어학원이 떼돈을 벌고 있으며 아무리 불황이어도 어학연수는 꼭 떠나야 하는 한국의 학생들은 이 땅에서 태어난 것을 원망하기까지 한다. 서너 살짜리 외국 아이가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을 보며 대단하다, 기특하다 여기면서도 자신의 한국어 실력이 유창함은 거의 생각해내지 못 하는 것 같다.

국내 CCM이 미처 자리를 잡기 이전부터 무수히 많은 곡들이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원곡을 알지 못 했을 때는 나름대로 그 가사나 분위기에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원곡을 듣는 순간 왠지 그동안 살짝 속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내가 생각했던 그런 곡들이 아니네? 일단 음악적으로 외국곡을 국내에 소개하는 일을 주도했던 찬양팀들의 분위기로 전환된 곡의 느낌 때문도 있겠다. 거기에 하나 더 말하자면 메시지를 담는 가사가 번역되면서 본래의 어감을 살리지 못 했을 때 아쉬움이 남는 경우다.

번역이라는 것은 단지 말을 말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문화를 문화로 바꾸는 것이다. 외국의 문화를 우리 문화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외국 문화 못지않게 우리 문화도 잘 알아야 한다.

You came from heaven to earth
To show the way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 위에
From the earth to the cross.
My debt to pay
십자가를 지시고 죄 사했네
From the cross to the grave,
From the grave to the sky,
무덤에서 일어나 하늘로 올리셨네
Lord, I lift your name on high
주의 이름 높이리
-Lord, I lift Your name on high (주의 이름 높이며) 중에서-

‘from~, to~’을 살리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비교적 느낌이 잘 살아난 번역이다. 가만히 보면 영시의 라임(rhyme, 소위 각운)이 보이는데, 현재 우리 운문 문학은 시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유시이기 때문에 영시나 한시처럼 꼭 지켜야 하는 운율이 없다. 그러니 번역하는 과정에서 굳이 그것을 살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국내 힙합전사들끼리 라임을 살리느냐 아니냐로 말들이 오간다고 한다. 나는 힙합의 랩 자체에 라임이 포함된 것이 아니라, 영어권 운문의 특징이라 보기 때문에, 우리나라 힙합에서는 라임이 꼭 지켜야 할 규칙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냥 운을 맞추고 싶은 사람만 지키면 되는 거다.)

그런데 ‘올리셨네’라는 말은 틀렸다. ‘올리다’는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누갗 ‘누구'를 하늘로 올렸는지 따져야 한다. 다른 문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려면 ‘오르셨네 (오르다)’라는 표현이 맞겠다.

다음의 경우를 살펴보자.

Just let me say How much I love you
Let me speak of your mercy and grace
주를 향한 나의 사랑을
주께 고백하게 하소서
Just let me live In the shadow of your beauty
Let me see you face to face
아름다운 주의 그늘아래 살며
주를 보게 하소서
and the earth will shake as your word goes forth
And the heavens can tremble and fall
주님의 말씀 선포 될 때에
땅과 하늘 진동 하리니
but let me say how much I love you
O my savior, my Lord and friend
나의 사랑 고백하리라
나의 구주 나의 친구
-Just let me say (주를 향한 나의 사랑을) 중에서-

'let'이라는 사역동사의 경우, 우리말에서는 직역을 하면 어색한 경우가 많다. 우리말에도  ‘사동사’가 있긴 하지만 영어의 사역동사와 완전히 똑같지 않다. ‘let me say'의 경우는 ‘하기 싫은데 억지로 말하게 했다’의 뜻이 아니라 ‘말하고 싶다’의 느낌이다. 게다가 ‘주를 향한 나의 사랑’은 쓸데없이 긴 것 같다. 그냥 ‘주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요.’라고 했으면 ‘Let me speak of your mercy and grace’를 잘라먹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실제 [Painter 1집]에 수록된 다른 번역본에서는 그 부분을 살려 놓았다.)

‘아름다운 주의 그늘’이라는 말은 문법적인 오역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다소 어색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그늘’이라는 말은 ‘어떤 사람의 영향권’이라는 의미인데, '스승의 그늘에 가려 빛을 못 보다’, ‘너 아직도 부모 그늘에서 살고 있니?’ 등과 같이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물론 노래 가사는 성경의 표현을 인용한 것이지만, 자칫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처음 이 곡을 접했을 때는 “아름다운 그늘”이라는 말에서 겨울을 ‘강철로 된 무지개’로 표현했던 이육사 식의 비장한 역설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이 정도의 오역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말의 느낌이 조금 다르게 혹은 문법적으로 조금 틀리게 번역된 정도다. 나처럼 예민한 사람에게 발견되는 정도이지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I have heard how Christians long ago
Were brought before a tyrant’s throne
나는 들었네 옛 성도들
폭군 앞에 끌려간 그 이야기
They were told that he would spare their lives
If they would renounce the name of Christ
주의 이름을 부인하면
살려 주리라 약속했지만
But one by one they chose to die
The Son of God they would not deny
모든 성도 죽음 택했네
오 하나님 아들 부인치 않고
Like a great angelic choir sings
I can almost hear their voices ring
지금도 그들 목소리
천사 노래처럼 나 들을 수 있네
-I Pledge Allegiance To The Lamb (어린양을 따르리) 중에서-

원가사를 모른 채 번역된 가사만 봐도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듯싶다. 일단, 우리말의 어순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문장을 통으로 보고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저 한 구절 한 구절을 직역했기 때문이다. "어찌어찌한 이야기를 들었다"라고 해야 자연스럽다. 뜻은 대충 통해도 우리말이 많이 다치고 말았다.

게다가 첫 구절의 ‘나는 들었네’나 '그 이야기' 같은 말은 군더더기다. 애써 살릴 필요가 없다. 또, 미묘한 차이지만 ‘그들 목소리 천사 노래처럼 나 들을 수 있네’보다는 ‘그들 목소리가 천사 노래처럼 들린다.’ 가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이 곡을 번역한 팀은 매년 외국곡을 번역하여 앨범을 내고 공연을 한다. 대부분의 곡들이 이런 식의 마구잡이식 직역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좋은 문화를 많은 교회에 소개하는 훌륭한 팀인데, 이 억지스러운 번역만은 고쳐지지 않는다.

번역도 번역이지만, 막상 노래로 부를 때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는 생각이 더 절실하다. ‘Jericho’의 경우, 랩인지 시 낭독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다. 어떤 식으로 번역을 하고 있는지, 번역의 기준이 무엇인지 참 궁금하다. 어색한 번역이 음악적 부분을 다 잡아먹는다는 점을 나만 느끼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영문은 영문대로 한글은 한글대로의 은혜가 있는데 표현의 차이.... 아쉽다.... 이런 글은 좀 마음에 걸리네요. 한글과는 다른 은혜를 받는다는 표현으로 바꾸어 주시면...’ 라는 내용의 글이 올라와 있다. 번역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영문과 한글 가사에서 서로 다른 은혜를 받으라고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미 사람들이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또 ‘시적 허용’을 운운하며 조금 틀려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시적 허용’이란 시인이 ‘이유가 있어서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지 번역의 실수를 덮어주는데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시골 어느 장에서 짚신을 잘 만들기로 유명한 사람이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솜씨를 어깨 너머로 배워 드디어 독립을 했다. 그런데 아들이 만든 짚신은 하나도 팔리지 않고 바로 옆에서 파는 아버지의 짚신은 금새 다 팔렸다. 아들이 보기에는 아버지의 짚신과 자신의 짚신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재료도 똑같고 만드는 방법도 똑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들이 만든 짚신을 신어본 후 꼭 아버지의 짚신을 사가는 것이다. 몇 달이 지나도 바뀌지 않자 결국 자존심을 꺾고 아버지에게 까닭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말씀하셨다. “이 녀석아, 털을 깎아야지, 털을!”

아들과 아버지는 짚신 완성의 개념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마무리가 잘 안 되어 있는 부분이나 까실한 부분이 남아있나 꼼꼼히 살피고 두루 만져야 비로소 명품 짚신 한 켤레가 완성된다. 외국의 좋은 곡들을 함께 나눌 때, 제발 털 좀 깎아주기를 바란다. 털을 깎을 능력이 없거나 그럴 시간이 없다면 우리말을 잘 아는 사람에게 보여줘서 감독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네가 해 봐~”라고 따진다면, 자신이 없다. 우리말만큼 외국어 능력이 좋지 않아서 그저 이렇게 딴지나 걸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조금만 더 정성을 쏟는다면 그들은 세상 모든 민족이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돕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쓰임받는다는 그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말도 조금 덜 고생하게 되겠지.

-크리스찬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