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승리는 어디에 있는가?

집회 인도 때문에 방문하게된 한국. 지금 찜통 더위가 한창이다. 이번 주부터 학교는 일제히 개학을 했지만 너무 더워서 단축수업을 한다던가 다시 방학에 들어간 학교가 부지기수다. 오늘 23일은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 그러나 이번 주말까지 무더위는 쉽게 물러가지 않을 전망이다. 더위 때문일까? 한 낮 길거리가 한산하다. 사람들의 모습도 활기가 없어 보인다. 잠 못 이루는 열대아, 30일을 훌쩍 넘긴 아프가니스탄의 인질사태, 눈만 뜨면 들통나는 유명인사들의 가짜학위, 홍수 피해 때문이라면서 10월초로 연기된 남북정상회담, 그러면서 예정대로 진행되는 평양의 아리랑 축전행사. 대한민국 전체가 아스팔트의 열기에 녹아 축 처진 것 같았다.

그런데 신선한 바람이 부는 곳을 발견했다. 오후 4시경 우연히 보게된 TV.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는 막 대통령후보 경선 투표의 개표가 끝난 모양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빅2의 승부는 이명박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적어도 6-7%의 차이가 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박근혜 후보에게 1.5%로 박빙의 신승을 거두었다. 여론조사가 합산되기 전까지의 선거인단 투표결과에서는 오히려 432표 차이로 지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승부. 아마 단상의 후보들은 찜통더위도 느낄 틈 없이 써늘한 상태였으리라.

이 후보의 당선이 발표되는 순간 박근혜 후보는 웃고 있었다. 이 후보가 박근혜 후보에게 손을 내밀 때도 박 후보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미소의 의미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의 귀와 눈이 박근혜 후보의 연설에 모아졌다. 순간 전당대회장은 긴장으로 가득 찼다. 그는 대의원들의 지지를 엎고 경선 무효를 선언할 수 있었다. 재검표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아니, 박후보의 지지자들은 이미 경선 무효를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짧은 연설은 매우 분명했다. "경선 패배를 인정합니다.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합니다. 오늘부터 당원의 본분으로 돌아가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 백의종군하겠습니다." 그녀의 선거참모들, 지지자들이 눈물을 터뜨렸다. 박후보의 계속된 연설은 감동의 연속이었다. "경선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은 잊어버립시다. 하루아침에 잊을 수 없다면 며칠이 걸려서라도 잊읍시다." 뒤 이어 나온 원희룡 후보는 "그의 대인 같은 모습에 진심으로 존경과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고 말하며 울먹이는 모습이었다.

난 TV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주로 신문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 그러나 그 날 처음 듣고 본 박 후보의 음성과 표정은 정말 굉장한 여자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감정의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생각을 이리저리 재고 숨기는 꼼수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하고, 단호하고, 선이 굵은 대인의 풍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것은 적어도 적장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생각하고 있는 성숙한 그녀의 인격에서 나온 것이리라. DJ의 눈 도장을 찍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다른 남성 후보들, 툭하면 경선에 불복종하며 국민의 뜻이라고 우기는 역겨운 정치인들 사이에서 박근혜는 군계일학이었다. 비록 이번에는 석패했지만 그녀는 한국 민주 정치의 큰 기둥이라고 생각된다. 이날 전당대회의 주인공은 승자가 아니라 단연 패자 박근혜였다.

민주사회 사회는 승리한 자만 살아남는 세계인가? 그렇다면 인간 세계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와 무엇이 다른가? 리차드 도킨스의 말처럼 인간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이기적 유전자만 갖고 있는 것인가? 인간에게 동물적 본능과 특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을 동물적 차원으로만 보려는 도킨스의 생각을 나는 거부한다. 인간에게 있는 인격은 어떤 동물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고상한 인격은 동물적 본능을 뛰어넘는다. 한 인간에게서 동물격보다 인격이 발달되면 발달될수록 대인의 풍모가 나타나게 된다. 성경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권고한다. 이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이기고도 질 수가 있고, 지고도 이길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동물은 눈앞의 이익만 보지만 인격을 가진 인간은 눈앞의 자기 이익을 포기할 수도 있다. 더 멀리, 더 크게 보는 눈이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전체를 생각할 수 있는 성숙한 인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인간사회는 살맛이 난다.

TV를 보면서 우리 이민 사회를 생각했다. 조그만 단체에서도 서로 양보할 줄 모르는 우리들. 별것 아닌 모임의 선거에서도 걸핏하면 불복종과 고소로 파가 갈리는 우리들. 선진 민주사회에 살면서 더 후진적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는 성숙한 이민사회, 지고도 이길 수 있는 대인의 이민사회를 꿈꿔본다.

당신은 남을 낫게 여길 수 있는 성숙함이 있는가? 적어도 남을 당신과 동등한 인격체라고 여기며 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