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지도자    

  인천의 명문 제물포 고등학교는 육이오 이후에 세워진 신흥고교. 고등학교가 평준화되기 전 제고를 졸업하면 대부분 서울대, 연대, 고대에 입학했다. 어떤 해는 서울대 전체 수석과 단과 대학 수석합격자 몇 명이 제고 출신이어서 그 당시 동아일보 고바우 만화에 '제물포로 가자'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사립학교도 아닌 공립학교가 갑자기 명문 고등학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한 사람의 탁월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길영희 교장 선생님. 제자들이 붙여준 그의 별명은 '석두'였다. 타협하지 않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밀고 나가는 뚝심 때문이다. 그가 교장에 취임되자마자 실시한 것이 유명한 무감독 시험이다. 선생이 시험 보는 자기 제자들을 믿지 못하고 눈을 부라리고 돌아다니는 것은 이 나라의 양심 있는 지도자를 키우는데 옳지 않다는 것. 선생님들 회의에서 반발이 컸다. 그래도 '석두'교장은 밀어 부쳤다. 그 해 낙제생이 10명이나 나왔다. 마음대로 컨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양심껏 시험을 치르고 낙제한 것. 교장 선생님은 그들을 교장 사택에 초청해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너희들은 이 나라의 양심이다." 그들에게 전원 일년간의 장학금을 지급해 주며 학업을 격려했다.

  사람은 공동체에 속하여 살게 되어 있다.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로부터 국가라는 큰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그 단체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지도자이다. 한 사람의 지도력에 따라 그 공동체가 살기도하고 죽기도 한다. 그러나 21세기는 점점 지도자의 지도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다원주의 경향 때문이다. 저마다 자기의 개성과 옳음을 주장한다. 대통령 입에서 '대통령 노릇 못해 먹겠다'는 장탄식이 나올 만도 하다.

  남가주 대학의 베니스(Warren Bennis)박사는 21세기의 가장 큰 문제는 리더십 결핍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는 리더십을 연구하면서 각 분야에서 성공한 지도자 90명과 3개월씩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성공한 리더십에는 네 가지 공통점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첫째 비전, 둘째 효과적인 교류, 셋째 낙관주의, 넷째 헌신. 리더십을 말하는 학자들 중 비전에 대하여 얘기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지도자는 보는 사람이다. 오스월드 샌더스는 '지도자는 더 멀리 보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남들보다 더 멀리 보며 그 목표를 향해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지도자다. 이때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대중들이 보는 것과 지도자가 보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가까이만 본다. 자기 주변, 당장 시급한 문제, 먹고사는 일상적 일들... 그러므로 지도자의 멀리 보는 비전이 자신들의 현실 문제와 상충되면 반발한다. 피 터지게 싸울 수도 있다. 이 반발이 무서워서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형 지도자가 된다.

  이집트에서 노예 살이 하다 400여 년만에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홍해 앞에 다다른 이스라엘 백성들. 막 이마의 땀을 씻어내고 있었을 때 뒤에서 그들을 추격해 오는 이집트 왕의 군대 소리를 듣는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추격병. 그야말로 진퇴양난. 군중들은 지도자 모세에게 대들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그때 모세가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가만히 서서, 주께서 오늘 너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보기만 하여라." 모세는 이 상황에서 우왕좌왕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분명한 목표를 보여 준다. 백성들은 코앞에 닥친 문제를 보고 있었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보고 있었다. 이것이 탁월한 지도자다.

  424일간의 긴 여정 끝에 한미 FTA가 드디어 채결되었다. 코리아와 미국의 합성어인 KORUS라는 단어가 생겼다. 일본이 미국과의 FTA를 채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도자들의 우유부단 때문이다. 특히 농민들의 반발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한국이 FTA를 체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의 결단과 뚝심 때문이다. 그는 반발하는 농민들에게 '농업도 이제 세계적인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라고 말하며 조약 체결을 밀어 부쳤다. 자신의 표현대로 노 대통령에게는 아무런 정치적 이득이 없다. 오히려 함께 일하던 옛 동지들과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FTA를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눈앞이 아니라 먼 장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무엇을 보며 사는가? 당신이 책임 맞고 있는 단체에서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