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에서 나폴리로 가는 길이었다. 터키 함대가 우리 길을 가로 막았다. 우리 배는 고작 세 척이었고 안개를 헤치고 나오는 그들의 갤리선 대열은 끝이 없었다.' 올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의 '하얀성'은 이렇게 시작한다.

베네치아의 학자인 '나'는 포로로 잡히고 터키인 '호자'의 노예가 된다. 작가는 그 둘을 한 방에 넣고 자신들의 얘기를 하게 만든다. 동양과 서양 주인과 노예 지배자와 피지배자. 호자는 자신의 노예인 '나'의 지식과 학문에 동경과 호기심을 갖는다. 호자는 동양인을 '그들'이라고 말하며 무지함과 모호함을 비난한다.

그러나 '나'는 궁중에 출입하면서 술탄의 영리한 모습에 관심을 갖는다. '나'와 호자는 놀랄만치 닮았다는 것을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다. 정말 닮은 것일까. 닮았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일까.

이해하기 쉽지 않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작품이다. 결국 파묵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목 '하얀성'에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체불명의 하얀성은 소설 끝 부분에 등장한다. "성은 하얀색이었다. 어쩐지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어떤 것은 단지 꿈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묵의 동서화합 실험은 "우리 군대는 성의 하얀 탑에 절대로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으로 끝난다. 결국 '나'는 나의 고향으로 호자는 호자의 고향으로 향한다.

사람들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대부분 겉도는 관계들이다. '나' '그' '그들'로 나누고 서로 닮은 점을 찾으려고 애쓰면서도 나와 다른 점을 찾아 비난한다. 결국 인간의 인격적 관계는 도달할 수 없는 하얀성인가.

뉴욕 사는 김씨가 LA여행 때 현지에서 잠깐 만났던 이씨와 가끔씩 기쁘게 교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수십 년 함께 살아온 배우자와 기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 진정한 휴식은 LA 이씨가 아니라 내 곁의 배우자 친구 동료와의 관계속에 있다.

성경은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말했다. 어떻게 서로 멀리 느끼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질 수 있는가. 피는 희생을 뜻한다. 관계는 희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성공하는 회사는 회사와 노동자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자신을 양보한다. 망하는 회사는 서로의 희생을 요구한다. 서독의 경제적 희생이 없었다면 동서독의 통인은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부부 관계 부모와 자녀 관계 친구 관계… 모든 관계는 양보와 희생을 기반으로 견고해진다.

파묵은 '하얀성'에서 '나'와 호자를 오랫동안 한 방에 가둬두고 서로의 관계가 회복되는지 실험했다. 만약 두 사람이 각자의 오만과 기싸움을 청산하고 서로를 위해 희생했다면 그 관계는 어떻게 발전됐겠는가. 두 사람은 하얀성에 도착해 꿈같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한국 정치판을 '개판'이라 불렀다. 최고위층부터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싸움판을 벌리고 있으니 개판이 맞다. 한국은 파묵의 '하얀성'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