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져주자

  다양한 인생사에 스트레스가 따른다. 그중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 때는 언제일까? 배우자 사망을 스트레스 지수 100으로 본다. 이혼이 73, 질병이 53, 결혼이 50, 직장 해고당함이 47, 임신 40. 어떤 집회에서 이 강의를 했더니 앞에 앉았던 한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다. "난 지금 결혼생활이 스트레스 100인데요." 난 그분이 진심의 말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배우자 사망이나 이혼보다 함께 사는 것이 더 높은 스트레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몇 주 전 발표된 한국의 이혼 경향을 보고 나서다. 결혼 생활 26년 이상한 사람의 이혼율이 결혼 3년 이하 사람들의 이혼율을 훨씬 능가했다. 이른바 황혼 이혼. 이혼 사유는 대부분 성격차이라고 나와 있다. 세상에 성격이 똑같은 사람이 어디 있나. 남녀의 성격 차이는 당연하다. 그 성격을 서로 알면서 26년 이상을 살아 왔다. 그런데도 초로에 접어든 나이에 이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정겹게 살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정들어 가는 관계가 아니라, 정나미 떨어지는 관계가 지속된 때문. 이들에게 결혼생활은 배우자 사망이나 이혼보다 더 스트레스가 많은 삶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이혼은 살인보다는 낫다. 얼마 전 플러싱의 한 아파트에서 86세 노인이 자기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도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끔찍한 일이 있었다. 칼로 여러 차례 아내의 가슴을 찔렀다. 86세 된 노인이면 근력이 많이 쇄했을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마음 가운데 미움으로 생긴 분노 때문이다. 분노는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부정적 에너지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종종 양으로 비유한다. 예수는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한다. 왜 이리 가운데 사자나 호랑이를 보내지 않고 양을 보내는 것일까. 금방 잡혀 먹을 것 아닌가? 자신이 라이언 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자기 과시, 만용, 욕심, 지배, 소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양으로 사는 사람들은? 양은 방어나 공격할 것이 하나도 없는 동물이다. 사자의 이빨도, 독수리의 날개도, 살쾡이의 발톱도, 사슴의 뿔도 없다. 상대방이 공격하면 그냥 당하는 동물이다.

  이성적인 자기 방어는 필요하지만 지나친 자기방어는 심리학에서 병적인 것으로 본다. 인간은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정상적인 노력에 실패했을 때 현실을 부인, 왜곡 또는 위장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방어하려 한다. 이것을 방어 기제라고 한다. 방어기제는 자신의 불안을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처리하는 삶의 습관이다. 자기 방어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는 가까운 사람들을 공격하게된다. 이때 그는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죄악감도 없이 그 행동을 스스로 합리화시킨다.  

  부부가 서로 자기 방어만 골몰하고 있으면 양쪽 다 피곤하다. 황혼이혼, 배우자 살해는 오랜 자기 방어에 지친 사람들이 내리는 불행한 결론이다. 한 가정에 호랑이와 사자가 함께 산다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한쪽이 양이라면? 그 가정은 산다. 성경이 말하는 사람이 사는 방법은 나 살고, 너 죽고의 방식이 아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윈윈 방식도 아니다. 내가 죽고 당신이 사는 희생 양식이다. 이때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난다. 이순신 장군이 말하는 생즉필사사즉필생이 바로 이 원리 아닌가.  

  가정에서 라이온 킹이 되려하지 말자. 양으로 살자. 좀 잡혀주자. 먹혀주자 져주자. 자존심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인간은 얼마든지 행복해진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바보여서가 아니다. 사랑을 위해서다. 평화를 위해서다.

  어느 교인의 추천으로 '음란서생'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제목이 껄꺼름 했지만 재밌게 보았다. 왕의 총애를 받는  여인이 최고의 문장가 윤서와 만나 사랑을 나눈다. 왕이 이를 알고 윤서를 죽이려한다. 그러나 여인은 윤서를 가로막으며 자기를 죽이라고 한다. 왕의 눈이 뒤집혀지는 순간 아닌가? 사자 같은 눈을 부릅뜨고 두 남녀를 난자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왕은 칼을 내던진다. 그리고 한마디하고 떠난다. "사랑은 약해지는 것이다."

  당신은 사자로 사는가 양으로 사는가? 사랑을 위해 약해질 수는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