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the mention of your name(주의 이름 부를때)||http://sam2.org/data/ccm/bowater/07.wma||-앨범-

기타 Fathful God,Instrumental Classics 외 다수앨범
-대표곡-
주님 큰 영광 받으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지존하신 주님이름 앞에
거룩하신 성령이여
신실한 하나님
주의 이름 부를때
온맘으로
하나님 어린양등 수백여곡

-리뷰-
크리스 보와터는 지난 20년 동안 서구에서 일어난 새로운 예배 형식의 예배부흥의 중심부에서 사역해 온 인물이다.
그는 10개의 주요 앨범과 두 권의 책을 펴냈으며, 수백 곡의 노래를 작곡했다.
그는 영국 중부의 링컨시에 있는 '뉴 라이프 크리스천 펠로우십'의 리더십 팀에서 사역하고 있으며, 음악과 여러 예술적 재능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인 '크리에이티브 미니스트리'의 책임자이다.

그가 작곡한 '예수의 이름으로','지존하신 주님 이름앞에','주의 이름 부를때'
'주님의 성령이', '온 맘으로', '주님 큰 영광 받으소서', '거룩하신 성령이여',
'하나님 어린양'등의 노래는 영미권에서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널리 불리고 있다
-보와터의 말말말-
예배의 사실성
(Chris A. Bowater 의 저서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중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임재하신 가운데 시간을 보내야 한다.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찬송에서 예배로 옮겨가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사랑을 표현하는데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려면 하나님과의 관계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없는 생활양식으로 변경하지 않으면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범위에만 머무르려고 하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교제 (intimacy)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다. 그 이유는 단지 진정한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활방식과 태도를 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15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하셨다.

우리는 '예배의 제사 (sacrifice of worship)' 라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다. 그것은 제물 (sacrifice)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으므로 그 하나님에게 예배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시편 기자는 우리는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서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문과 궁정을 지나서 성소 즉 하나님에게까지 친근한 곳으로 갈 수 있을 때 예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 기도라는 문과 찬송이라는 궁정을 통하지 않고는 성소에 들어갈 수 없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익숙하게 알게 되듯이 예배샐활에도 역시 익숙해야 한다.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사람, 즉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 역시 실질적으로 우리의 감정(emotions)의 투자가 있어야 한다.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감정에 인색한 듯한데, 이것이 교회 안에서의 행위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시편 기자는 말한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합니다' (시9:1), 그리고 또 '할렐루야, 내가 .....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111:1)

더 나아가, 여호와를 기뻐하라 (시37:4) 하고,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시9:2), 즐거워 외친다 (시32:11) 라고 쓰고 있다. 웃고 소리치고 설교하고 부르짖고 불러대고 노래하는 것은 다윗이 영을 쏟아 부어 진심으로 찬송하는 행위를 대변하는 몇가지일 뿐이다. 손뼉치고, 손을 들어 올리고, 일어서고, 절하고, 춤추고, 무릎꿇고, 걷고, 묵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거룩케 함을 소망하는 마음의 표현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마음을 다하는 예배의 태도는 인간적인 방어의 마지막 보루 즉 감정 (emotions)을 바치는 것을 함축적으로 의미한다.

오래 전 내 아우 앤토니가 성령으로 세례받기를 소망했던 때가 눈에 선하다. 그의 타고난 성격이 감정 관련 부분에서 극단적으로 방어적이다. 그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몹시 곤혹해 했는데 무엇보다도 자기 감정을 남에게 노출시키는 것을 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합리적인 사람으로서 모든 일을 추론과 논리를 바탕으로 처리했다. 마침내 그는 성령의 내재하시는 능력 (indwelling power)과 임재하심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폈다. 성령은 그 어떤 것도 또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부분에까지 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 나와 한 친구가 소박하고 담담하게 앤토니를 위해 기도했다. 앤토니는 내가 본것 중 가장 성령 안에서 눈물젖은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장장 세 시간 동안이나 그것도 때때로 격렬하게 흐느끼며 울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우는 법도 가르치셨나 보다. 이제 깊은 감정의 우물이 지표 가까이 올라온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관해 말을 시작하면 앤토니의 눈은 기다렸다는 듯 감사와 사랑의 눈물로 흥건해진다. 예배는 딱딱한 마음에서 흘러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95편에서 찬송과 예배를 권고하고 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라고 시작하면서 '너희가 그 음성을 듣거든 ....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라고 넌지시 경고까지 한다. 이것이 예배로의 부름의 핵심적 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