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ee the Lord||mms://tpop.bugsmusic.co.kr/20030517bugsmusicdevpart1pop/pop/0R/pop0R143044.asf||Ron Kenoly


'나이트 클럽의 싱어에서 세계적인 예배인도자로'

샌프란시스코만(San Francisco Bay) 지역의 저녁은 서늘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여름밤은 찌는 듯이 덥다. 그의 고개는 떨궈져 있고 큰 어깨의 근육은 절망 속에 늘어져 있다. 론 케놀리(Ron Kenoly)는 Bancroft 큰길가 64번 가의 구석에 있는 작은 오순절교회[Foursquare Church/영광의 주님 찬양하세(Majesty)를 작곡한 잭 헤이포드(Church on the Way)가 속해있는 교단]의 텅 빈 예배당에 들어가서 그는 조용히 지성소를 향하여 나아갔다. 그리고 성전 바닥에 엎드렸다. “하나님은 나의 음악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일까?” 그는 의아해 했다. 세상의 레코드 회사들은 그의 재능을 요구하고 있지만, 크리스천 레코드 회사들은 그의 오디션 요청을 무시했다. 그의 삶을 주님께 재 헌신한 그날, 그의 음악경력은 끝나는 것인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케놀리는 그가 알고 있는 예배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빈 의자로 둘러싸인 적막한 교회에서 그는 그의 마음 안에 있는 음악을 하나님께 올려 드렸다. 그 “콘서트”가 끝났을 때 많은 눈물과 함께 한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그 밤으로부터 케놀리는 하나님 단지 한 분의 관객을 위해 노래하도록 부름 받았음을 알게되었다.

1982년 8월 저녁을 설명하면서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난 12년 동안 그는 그날 밤에 상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과 그의 음악을 나누는 꿈이 이루어짐을 보아왔다. 오늘날 론 케놀리의 이름은 정열적이고도 힘이 넘쳐나는 찬양음악 그 자체이다. 그의 두 앨범 “Jesus is Alive"와 “Lift Him Up"은 인테그리티에서 제작되었으며 가장 인기 있는 찬양과 경배 앨범이 되었다.

1993년 12월에 “Lift Him Up"은 빌보드 톱 컨펨포러리 크리스천 순위(Billboard's Top Contemporary Christian Chart)에서 70주 이상을 머물렀다. 케놀리의 새롭고 강한 스타일의 찬양과 경배는 심지어 가장 싫증내는 청중에게도 손뼉을 치고 몸을 움직이게 하며 노래 부르게 한다. 그의 음악은 팝, 블랙 가스펠, 카리비안 리듬을 포함한 다양한 사운드로 케놀리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하였고, 그에게 열려진 문들은 그의 음악을 세계 주요나라에 까지 보급하게 하였다. 18살까지 집으로부터 200마일을 결코 여행해 본적이 없는 사람을 말이다.

[IN PURSUIT SUCCESS]-성공을 얻고자

여섯 아들의 셋째로 케놀리는 1944년에 캔사스(Kansas)의 Coffeyville에 있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공군 하사관이어서 집을 떠나 있을 때가 많았다. 사실상 론의 어머니는 혼자서 자녀들을 양육하고 자녀들에게 안정된 생활을 주기 위해 고생을 하셨다. 론은 어려움 가운데 처해있는 환경에 개의치 않고 기쁨으로 불렀던 어머니의 가스펠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는 론이 어린 시절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결단한곳인 유니온 침례교회에 케놀리 가족이 정규적으로 출석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작은 고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이 더 의미 있는가? 에 대하여 의심하게 되었다.

“Coffeyville은 거의 모든 사람이 크리스천이라 할 수 있는 지역이다.”라고 케놀리는 말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어떤 사람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본 ‘능력’이라고는 오랄 로버트(Oral Roberts)목사님이 사람에게 손을 얹어 놓으시는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보았을 때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내 삶 가까이 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라고 케놀리는 말했다.

작은 침례교회에서 케놀리에게 준 것이 하나있다면 그것은 그의 첫 사랑인 노래의 배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꿈은 Coffeyville의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 부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 그는 그의 음악을 큰 도시의 밝은 빛에 옮겨놓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오클라호마(Oklahoma)의 툴사(Tulsa)에서 몇 달을 보낸 후에 그는 서부에서 남부 갤리포니아(California)로 머리를 돌렸다. 거기서 그의 전문적인 음악인생은 우회를 하게되었다. 직업으로서 착수하기에는 불확실한 기대에 직면하게 되어, 새로운 장소들과 새로운 기회를 위한 길로서 케놀리는 공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군대를 제대한 뒤 케놀리는 남편과 아버지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그의 아내가 된 타비타(Tavita)는 그가 공군에서 만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Puerto Rican에서 만난 아름다운 여성으로 그에게 첫아들을 안겨 주었다.

1968년 10월에 군대를 제대한 후에 케놀리는 그의 가족을 데리고 명예와 재물을 얻기 위해 로스 엔젤레스(Los Angeles)로 이사를 하였다. “나는 스타가 되려고 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Lou Rawis처럼 부드러운 바리톤의 목소리로, 케놀리는 곧 나이트 클럽에서 팝과 소울의 히트곡을 부르며 삶을 시작하였다. 더욱이 “Up Up and Away", "By the Time I Get to Phoenix"등의 히트곡을 작곡한 짐 웹(Jim Webb)의 노래를 녹음하기로 오디오 아트(Audio Art)사와 계약하였다. 그 처음 계약의 영향으로 더 수익이 좋은 계약들이 이루어져 MCA, United Artists, Warner Brothers, A&M과 계약을 했다. 비록 큰 히트를 기록한 앨범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는 생활하기에 충분한 히트곡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멋지게 출세를 하였고 음악산업계에서 인정 받고있었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케놀리는 그 성공은 희생 없이 온 것이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비록 그의 인기는 상승하는 중이었으나 그의 결혼 생활은 곤두박질하고 있었다. “우리는 7년 동안 혼란스러운 결혼 생활을 하였다”, “거기에는 많은 폭력과 말다툼 그리고 정신적인 학대가 있었고 마침내 그것은 별거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것은 추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1975년 초에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론 케놀리처럼 교회에서 성장했던 타비타는 L.A에서 유명한 오순절교단 Angelus성전에서 봉사하는 동안 그녀의 일생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재 헌신했다.

“Angelus교회의 여성들은 타비타에게 또 다른 이혼 대열에 끼어서는 안된 다고 그녀를 설득했다.”라고 케놀리는 말했다. “그들은 그녀에게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 그녀 가족을 되찾을 것을 말했고, 그들은 그녀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으며, 그녀는 그렇게 했습니다.” 케놀리는 그의 아내의 드라마틱한 변화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게 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캔사스에서 자라는 동안 결코 본 일이 없는 것이었다. “그때 난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라고 그는 말한다.

1975년 11월 19일 그는 그의 삶을 다시 하나님께 드렸다. 다음날 케놀리는 Angelus성전의 앞줄에서 무릎꿇고 기도할 때 그에게 성령의 세례가 임했다. 케놀리는 그의 낡은 생활방식을 포기해야함을 깨닫고 그의 밤 클럽활동을 그만두었고 그의 가족은 400마일 떨어진 캘리포니아의 오클랜드로 옮겼다.

[DEATH OF THE DREAM?] - 꿈을 이루기 위한 죽음

케놀리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데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그의 성공적인 경력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나는 Alameda대학 라커룸(체육관 탈의실)에서 수건을 나르는 일을 시작했다. 그것은 겸손이 요구되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다시 옛날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케놀리는 낮에는 일을 하였고 밤에는 음악학위를 얻기 위해서 야간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18개월 동안 라커룸에서 열심히 일한 후에 그는 평가와 승급을 위해서 대학학장 실에 호출되었다. 케놀리와 그 학장이 놀란 것은 그들의 만남이 두 사람 모두 예측하지 못한 은혜로 바뀐 것이었다. “그 학장은 내가 6개의 음반을 발매하였고 히트곡과 음악적으로 성공적인 활동을 했었다는 설명을 듣고 매우 놀랐다.”라고 그는 말한다.

케놀리의 재능을 더욱더 잘 사용하는데 관심을 가진 학장은 이력서를 준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서류가 캘리포니아에 제출되었을 때 케놀리는 교사 자격증과 석사학위에 동등한 신임장을 취득 받았다. 그 대학은 즉시 성악을 가르치기 위해서 케놀리를 고용했다. 그들이 오클랜드에 도착한 후에 론과 타비타는 론이 성가대에서 노래 불렀던 침례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비록 그들의 영적 생활이 무언가 결핍되었음은 알아 차렸지만 그들은 침례교회에서 평온함을 느꼈다. “나는 Foursquare(오순절 교단)에서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 무엇인가가 더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라고 케놀리는 말한다. “그러나 나는 다른 형태의 환경에 내가 들어가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명백하게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1979년에 타비타는 셋째 아이를 임신한 동안에 합병증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을 필사적으로 갈망하며 그녀는 그들의 집 건너편에 있는 작은 Foursquare교회인 Faith Fellowship에 출석하였다. 타비타가 성도의 사랑을 통해 치유를 경험한 후에 그녀와 론은 그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케놀리는 오순절 교회에서 가끔 예배를 인도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전문적인 가수로서 인생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체계적인 단계를 밟아 나갈 것을 생각하며 그는 크리스천 음악회사들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나는 벤슨(Benson)뮤직으로부터 ‘고맙지만 안되겠다’는 한 통의 편지 외에는 내 편지들의 답장조차 받지 못했다.”라고 케놀리는 말한다. 크리스천 회사들의 계속적인 거절은, 그가 세상 음반회사와 나이트 클럽의 요구를 더 거절하기 어렵게 했다. 모든 것이 희망이 없어 보였다. 케놀리는 크리스천 음악에서 비전이 없는 듯이 보였으나 다른 제안을 승낙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놓아두신 기준에 어긋나 타협함을 의미했다.

“1982년의 여름은 나의 삶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내가 음악을 사랑한 만큼 나는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결코 다시 노래할 수 없음을 뜻할지라도 세속적 음악에 되돌아 갈수가 없었다.” 케놀리가 그때 다니고 있던 작은 교회의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그 자신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한다는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비록 아무도 듣기를 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들으실 거라고 믿었다. 만약 그것이 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도 그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날 밤 케놀리는 주님을 위한 콘서트를 드렸다.” 그날 밤 케놀리는 전문적인 아티스트가 되겠다는 그의 꿈을 버렸다. 그런데 그 순간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케놀리는 크리스천 행사와 다른 교회들의 예배인도를 위한 초대를 받기 시작했다. Laster Sumrall, Jack Hayford, 그리고 ED Cole을 포함한 다양한 리더들에게서 요청이 들어왔다. 마침내 복음전도자 Murillo는 그의 십자군들의 예배인도를 위해서 케놀리를 고용하였다. Murillo와 다른 친구를 통하여 케놀리는 1985년에 Dick Bernal목사님을 만났다. Bernal목사님은 캘리포니아 산 호세에 있는 쥬빌리 크리스천 센터를 4년 이상 사역해오고 있으며, 그의 인도하래 15,000명이 넘는 성도가 있었다. Bernal목사님은 케놀리에게 쥬빌리의 예배인도를 부탁하였고 1987년까지 케놀리는 음악목사로서 그 교회의 전임 스텝으로 헌신하게 되었다. 히트 음반을 만들려던 지난날들의 그의 희망들..... 그러나 그는 예배 안으로 다른 이들을 인도하는 것에서 기쁨과 만족을 발견하였다.

[THE BIG BREAK]

8년 후인 1990년에 케놀리는 오순절교회인 믿음교회(Faith Fellowship)에서 잊지 못할 콘서트를 가졌다. 인테그리티 뮤직(Integrity Music Vice)의 부사장인 돈 모엔(Don Moen)은 엄청난 명성을 얻고있던 론 케놀리의 예배를 직접 경험하기 위해 쥬빌리를 방문했다. 돈 모엔은 케놀리의 능력과 억제되지 아니하는 기쁨에 큰 감명을 받았고, 그를 인테그리티의 찬양과 경배앨범 녹음에 초대하였다. 케놀리는 이일을 수락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기도할 필요가 없는 몇 가지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중 하나였다”



케놀리와 쥬빌리 교회의 회중이 함께 한 “Jesus is Alive"는 1991년에 발매되었는데, 이 앨범의 성공으로 인테그리티는 2번째 앨범녹음을 케놀리에게 요청하였다. 그의 첫 앨범의 폭발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도 ”Lift Him Up" 에 대한 놀라운 반응을 예측하지 못하였다. 1992년 5월에 발매된 이 앨범은 가장 빠르게 팔린 찬양과 경배 앨범이 되었고, 그해 가스펠 뮤직 협회에서 수여하는 도브 상을 수상하였다. 이 성공은 인테그리티에서 케놀리를 독점으로 레코딩 계약 한 결과였다.

그의 이러한 성공에 이어 3번째 앨범 “God is able"이 나왔는데 케놀리는 이 앨범에 대해 “나는 이 앨범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나는 나의 음악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만졌음(Touch)을 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예배를 인도할 때 나는 내가 가야할 곳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따라오라고 초대하였다. 나는 예배에서 상투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단순히 예배 안에 역사를 이루시는 성령을 말한다.”

케놀리는 그의 앨범 성공을 통해 쥬빌리의 Bernal목사의 후계자로 추천을 받았고 새로운 음악목사로 자리를 굳혔다. 케놀리는 7,000명이 넘는 성도들이 참여하고 있는 교회에서 스탭으로 계속해서 사역하고 있다. 그는 한 달에 한번정도 예배를 인도한다. “Dick Bernl목사의 교회에 대한 비전은 가족적인 예배센터, 성경공부 센터, 세계 선교를 위한 센터를 만드는 것이다.”라고 케놀리는 말한다. “국제적인 사역 초대에 대해서 Dick목사님은 나의 사역을 교회비전의 한 부분처럼 생각하셨다.” 케놀리는 예배 훈련 센터 조직을 포함한 미래 계획에 대해서 “많은 예배세미나와 회의가 있지만 리더가 철저한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센터는 단지 소수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케놀리는 예배 훈련 센터의 문을 열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론은 알고 있다. 1982년 여름밤 하나님께서 “론 나는 너를 불렀다.”라고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 것을.......

론은 말한다.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다. 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내가 하나님을 만났음을 알고, 어느 누고도 나로부터 그것을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예배를 인도할 때마다 나의 마음은 그 밤을 향해 돌아간다. 그날부터 나의 마음의 소원은 내가 갔던 그곳을 향해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DISCOGRAPHY

The Perfect Gift (RKM Release, 2001)
Dwell In the House (Hosanna! Music, 2001)
We Offer Praises (Word Entertainment, 1999)
Welcome Home (Word Entertainment, 1998)
Majesty (Word Entertainment, 1998)
High Places: The Best Of Roy Kenoly (Word Entertainment, 1997)
Welcome Home (Word Entertainment, 1996)
Sing Out With One Voice (Integrity Music, 1995)
God Is Able (Hosanna! Music, 1994)
Lift Him Up(Hosanna! Music, 1992)
Jesus Is Alive (Hosanna! Music, 1991)

글출처:(주)인피니스
그림출처-www.ronkenoly.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