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찬송을 부르라
최혁/규장 문화사/1994

제 1장  나의 찬송을 부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여기에 나오는 나의 찬송(테힐라티), 즉 하나님의 찬송은 어떤 찬송일까? 여기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서 충분히 가르쳐 주셨을 것이며 그것은 성경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성서에는 문자만 있을 뿐 악보나 음향은 포함하고 잇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성서에 있는 음악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성경 이외에 부교재라고 할만한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첫째 고대 중동지방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이고, 둘째로 유대주의의 전통이 있으며, 세번째는 제2 성전이 파괴된 후 유대 랍비들에 의하여 쓰여졌거나 집대성되었던 문헌들이 있다.

제 2장 태초의 음악

하나님과 음악의 근원에 해답을 주는 것은 오직 성경뿐이며 특히 창세기는 매우 중요하다. 창세기 1장 1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이 살아가게 될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셨음을 장엄하게 선포하고 있다. 그것은 음악이 존재할 수 있는 기본적인 요소가 마련된 셈인데 그 이유는 음악은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적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음악에 있어서의 시간적 요소는 리듬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음악은 창조하신 시간 위에 근거를 주고 있기 때문에 음악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질 수 있다. 음악의 근원이 무신론적 바탕 위에 있을 때 인격을 파괴하고 불행한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시면서 소리를 처음으로 발하셨다. 음악의 기본적 요소인 소리를 처음으로 창조하셨고 그 속에 사상과 감정ㅇ르 나타내셨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셔서 찬송을 부르게 하셨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나의 찬송'이 지정곡이다. 그러나 그 어원을 살펴보면 그 방법에 있어서는 자유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 3장 창세기의 음악

창세기에 쓰이는 음악은 세속음악과 찬송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첫 기록은 가인 후손들의 세속 음악이다. 그러한 음악의 주요 기능은 오락, 전쟁, 마술적 주문으로 이러한 음악은 처음에는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지만 우리의 감정을 뒤틀고 영혼을 마음대로 주무릅니다. 인간 문화와 하나님의 세계는 결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가인의 문화는 홍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성경에서는 이 심판 후에 첫 찬송이 나온다. 구약에서는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동사로 '할랄'이 있으나 이것은 창세기에서 오직 한번 사용되고, 창세기에서 사용된 바락, 야다는 구약 전체에서 할랄 다음으로 많이 사용된 단어이다. 바락의 기본적 의미는 '무릎 꿇다', '축복하다'라는 뜻이다. 구약에서는 축복은 물질적인 것이고 신약에 와서는 영적인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남을 축복한다는 것은 나 중심에서 남 중심으로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며 진정한 찬양은 자신이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바치는 행위이다. 야다는 찬송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연약한 인간의 모습에도 용서하고 받아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이다. 야다는 이 뜻이외에도 '고백하다', '감사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여섯 번의 '찬송'의 단어는 축복, 감사를 의미하기도 하고, 선택받은 자의 거룩한 행위이며, 구원의 역사와 관계가 있다.

제 4장 홍해의 대 합창제

출15장 찬송은 성경에 처음 나오는 찬송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의 찬송'의 효시이다. 따라서 이 모세의 찬송은 찬송의 올바른 방향과 방법을 제시해 줄 것이다. 일절 상반절에는 이 찬송을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몇몇 음악을 잘 아는 특수한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덧입고 그 은혜를 아는 자가 함께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찬송은 대중들이 부를 수 있는 쉬운 것이어야 한다. 출15장은 이스라엘만의 민족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찬양은 대중적이어야 하지만 그 내용은 개별적이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 없다면 우리의 찬양은 진실한 찬양이 되기 어렵다. 그리고 성경의 첫 찬송은 매우 열정적인 노래이므로 우리도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은 열정적으로 불러야 한다. 그러나 그 열정의 방향은 죽음의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 터 나오는 기쁨과 환희와 행복에 가득찬 영원한 삶의 방향이다.

제 5장 이 노래가 그들 앞에서 증인이 되리라

신31,32장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르세 하는 마지막 노래인데 이 노래를 가르치는 목적은 증거이다. 인간의 가장 큰 병은 은혜강막증이다. 사람이 먹고 배부르고 살찌면 옛일을 잊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위한 노래가 필요한 것이다. 신32장의 주제는 두 가지 증거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증거하고 하나님께서 택하고 인도한 백성의 지금 상태를 정확하게 증거 한다. 지금까지 배운 모세의 두 노래는 노래의 두 가지 목적을 가르쳐 준다.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고 두 번째 목적은 '증인'이다.
수 천년 성서 시대의 음악을 들려다 보기 위해 그 당시 히브리 노래가 계속되어 연구되고 있다.
히브리어에는 노래라는 단어가 크게 4종류가 있다. 그 중에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쉬르'이고 모세 오경에는 주로 이 단어가 많이 쓰였다. 시편에는 '쉬르'와 함께 '미쯔모르'라는 단어가 많이 쓰이고 있고 '시'로 번역된다. 좋은 노래가 되기 위해서는 노래와 가사가 협조적이어야 하지만 성서의 노래의 핵심은 가사 즉 말씀이다. 성서 음악의 대중 찬송은 교창을 원칙으로 세 가 지의 형식으로 불리워 졌으며 그 외에도 독창이나 대창의 형식이 기록되어 있다. 성서 음악은 하나님의 말씀은 섬기는 것이 근본 목적이기 때문에 복잡하고 모호한 음악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가리워서는 안된다.

제 6장 나팔을 불어라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중 가장 중요한 사건 셋은 출애굽, 왕정의 출현, 포로 생활로서 이 사건을 전후로 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고 음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가나안에 정착 초기 많은 전쟁들을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행위라고 보았던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에게 승리를 안겨 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렸다. 가나안에 정착해 가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노래 목록에는 농경이나 노동에 관련된 노래들이 첨가되었고 음악적인 요소도 유목민의 리듬이 강조된 음악에서 농경 문화권의 선율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왕궁이 건설되자 음악의 수준도 높은 수준으로 향상되지만 이것들이 궁중의 권력자나 개인 부자들의 집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타락하게 된다. 음악의 타락은 그 사회의 타락을 의미하듯이 예루살렘 문화도 500년이 가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왕궁과 함께 성전의 음악도 이스라엘  왕조시대 음악의 중심이 된다.
여리고 성과 싸워야 하는 여호수와와 훈련되지 않은 삼백 명의 군사로 미디안과 싸워야 하는 기드온의 리 이야기의 공통점은 거룩한 나팔이다. 이스라엘이 사용하던 나팔은 2가지로 은을 두드려 만든
'하쵸츠라(민10:1~10)'와 수양의 뿔로 만든 '쇼파르'로 수6장과 삿7장에 22번 등장하는 나팔은 쇼파르이다. 이 나팔 소리는 인간의 생명과 연관이 있는데 그것은 구원의 소리이면서 마지막 심판의 소리이다.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음성이 두 번씩이나 나팔 소리와 같은 음성이라고 하고 출19,20장과 계8,9장의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낸다. 적들에게 완전히 누출된 채로 여리고 성을 돌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한 것은 나팔 소리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거룩한 나팔 소리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힘찬 찬송을 의미했고 이 찬송 가운데 하나님은 함께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승리는 자명한 것이다. 우리의 찬송도 이 나팔 소리와 같아야 할 것이다.

제 7장 수금 연주자 다윗

성서 음악은 다윗으로 부 터 유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수금 연주자로, 작곡자, 작시자, 음악 감독, 악기 제조자, 음악 치료사, 성악가, 하나님 찬양자로 다양하게 활동하다. 다윗의 공식 무대의 첫 등장은 사울을 위한 음악 치료사로 수금을 연주하는 일이다. 그는 조그만 마을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목동이었지만 그의 수금 실력은 대단했고 궁전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그가 사용한 수금은 현악기의 일종으로 히브리어 '킨노르(     )'의 번역이다. 성경에서는 현악기가 킨노르와 '네벨(    )'인데 네벨은 '비파'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사울에 드린 악신을 몰아낼 수 있었을까?
우선 첫째로 다윗의 연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연주였다. 두 번째로는 다윗의 연주는 병기로써의 찬양이었다. 하나님의 찬송은 어두움의 세력을 파하는 무기가 되는 것이다. 세 번째, 다윗의 연주는 성령 충만의
찬양이었다. 성령 충만한 음악은 성령 충만한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 지며 다윗은 그러한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다윗은 어떻게 연주하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먼저 찬양은 음악적으로 잘 다듬어진 기교의 찬양이어야 하는데 다윗은 이를 위해 매일같이 연습하고 연주하는 사람이었다. 다윗의 표현 법은 '즐겁게','힘있게', '크게'였다. 하나님 찬양의 연주 기술은 그 방향이 복잡하고 감상적인 예술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힙있고 즐거움이 가득찬 밝은 예술성에 있다. 또한 다윗은 음악 감독으로서 연주자에게 내적인 마음가짐에 대하여서도 반복하여 가르치고 있다.

제 8장 하나님의 궤와 다윗의 찬송

히브리어로 '아론(    )'이라고 하는 궤는 '언약궤', '증거궤', '아웨의 언약궤',등으로 불리우고 삼하6장에서는 '여호와의 궤', '하나님의 궤'로 불리워 지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이 '궤'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고 전 국민 생활의 중심이요, 방향이요,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영적 감각이 없어서 궤에는 관심이 없던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후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삼하6:5는 예배의식으로서의 첫 음악이면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오케스트라가 사용된 것을 알려 준다. 그러나 처음에 궤를 옮기는 시도는 웃사의 죽음으로 실패에 그친다. 그것은 다윗이 자기의 방식대로 궤를 가져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는 것과 찬양을 하나님 방식이 아닌 내 방식대로 한다면 그것은 이미 찬양과 말씀이 아니다. 그러나 두 번째는 성공을 하게 되는데 그 기록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첫 번 째와 달리 먼저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자녀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먼저 원하시고 그 방법은 '제사'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궤를 운반할 때에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레위 자손이 채로 어깨에 매고' 운반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찬양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관대하셨다.
다윗이 하나님이 궤 앞에서 '몸을 드러내면서'찬양을 하고 가족들을 축복하려고 들어올 때의 미갈이 태도는 찬양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우선 미갈의 잘못은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겁게 부르며' 기뻐 찬양할 때 동참하지 않은 것에 있다. 두 번째로 그녀가 동참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가 아니라 사람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미갈의 기쁨으로 하나님께 동참하지 못한 이유는 자기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제 9장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

대상6장에는 찬송하는 일을 맡은 자의 이름이 셋이 나오는데 그들은 헤만(33), 아삽(39), 에단(44)이다. 헤만은 이스라엘 초기 왕조의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던, 다윗을 왕으로 세운 사무엘의 손자이다. 그러한 집안에서 태어난 헤만은 '내 할아버지가 세운 자'의 임명을 겸손히 받아 들이고 다윗의 관심이 아삽에게 넘어가도 아삽의 선두 위치에 도 불만을 갖고 뛰쳐나가지 않았던 겸손한 하나님의 찬양자였다. 아삽은 헤만의
오른쪽에서 직무를 수행하다가 우두머리가 되는데 시편의 아삽의 시는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나타내 준다. 그는 자신의 허물과 약점을 남에게 내보일 수 있는 영적 투명성의 자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세 번째 인물인 에만은 대상16장에 이름이 빠지고 대신 여두둔이 나타나는데 그들은 동일 인물이었다. 세 개의 시편(39, 62, 77)이 '여두둔의 법칙에 의지하여' 찬양하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여두둔이 스스로 작곡하여 부른 찬송이었을 것이다. 여두둔은 음악적으로 가장 뛰어 난 사람이었다.
이러한 세 사람은 자신들의 개성도 있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로써 공통된 모습도 있었다. 첫째는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찬양자라는 것이고 둘째는 레위의 자손인 선택된 찬양자들이었으며 말씀을 받드는
선견자였다.

제 10장 여호와의 악기

구약에는 총 18종류의 악기 이름이 등장하지만 어떤 이름은 같은 악기에 두, 세 가지 이름이 있기도 하여
악기의 종류만 말하자면 타악기5종, 현악기5종, 관악기5종 모두 15종의 악기가 구약에 등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사용된 악기는 오직 현, 탁, 관악기 2종씩으로 그 중에 현악기 수금과 비파가 성전 예식 음악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현악기로 수금(킨노르)는 성경에 가장 먼저 기록된 악기이지만 다윗에 이르러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쓰여
졌고 솔로몬 왕 시대에는 성전 음악의 주축이 된다. 비파(네벨)은 거의 같은 종류의 악기인데 왕국이 건설된 다음에야 성경에 나타나지만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세속적으로도 사용되었다.시33:2, 92:3, 144:9에만 등장하는 열줄 비파는 '아쇼르'의 번역으로 확실치는 않지만 비파와 같은 종류의 악기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단3장의 현악기 수금(카트로스), 삼현금(샤브카), 양금(프산테린)은 느부갓네살 왕의 금 신상을 경배하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한번도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사용된 적은 없다.
관악기로서 나팔(쇼파르)는 성서에 가장 많이 언급된 악기이다. 그것은 숫양의 불로 된 것으로 신호용,
효과용 악기이고 주로 전쟁이나 진을 위한 신호로 사용되어지다가 다윗때에 와서 종교음악에 사용되었다.
나팔(하쇼츠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유일한 악기로 역기 신호용으로 사용되어 졌지만 다윗 이후
예배 음악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나팔에 쓰인 이름은 그 외에도 '오벨'과 '케렌'이 있는데 오벨은 쇼파르와 같은 악기이고 케렌은 소의 뿔로 만들어 졌고 이방 민족들이 사용하였으며 단3장에 느부갓네살 금 신상을 경배하기 위해 등장한다. 피리는 세 개의 명칭이 있는데(할릴, 우가브, 마쉬로퀴) 마쉬로퀴는
느부갓네살 금 신상을 경배하기 위해서, 할랄, 우가브는 세속적인 목적으로 쓰였다.
타악기에 쓰여진 명칭은 악기의 소리에서 나온 의성어이다. 소고(토브)는 국악기의 소고와 비슷한 악기로
주로 여성이 사용하고 춤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성전에서의 사용은 허락되지 않았다. 제금은 심벌즈와 같은 타악기의 번역이다. 히브리어 머찔타임, 쨀쨀림의 두 종류가 있고 이들은 같은 종류의 악기이지만 크기나 연주 방법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한번도 제사장 이외의 계급이 사용한 적이 없는 악기요, 성전 예식의 악기이다. 양금은 단3장의 '프산테린' 현악기와 삼하6:5의 '므나아님'의 탬버린과 같은 타악기의 번역이다. 경쇠는 삼상18:6의 '샬리쉼'의 번역인데 그것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생황은 '숨파니아'의 번역인데 이것은 악기가 아니라 악기 전체의 앙상블을 의미하는것이다.
성서의 악기는 대부분 합주를 하는 모습이다. 그 기악 음악의 특징은 성악 반주라는 사실인데 그것은 음
자체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였다.

제 11장 음부에 떨어진 비파 소리

음악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이러한 음악의 힘을 알고 그를 이용하여 인간을 파멸로 몰고 가려는
자가 있는데 그는 사탄이다. 복음적인 성서 학자들은 사14:3~24, 겔28:1~19을 사탄의 원시적인 상태와 타락을 언급한 구절이라고 말한다. 사탄은 처음부터 어두움과 저주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최고의 지혜와 완전한 아름다움을 부여하셨다. 그는 천사 중 최고의 계급이었고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진과 미는 있었지만 선은 없었고 결국 선의 가치가 떠난 진과 미는 교만으로 나타났다. 루시퍼가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악기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타락한 후 음악은 사탄의 도구가 되어 버렸다.
대중 음악이나 클래식 음악은 세상 음악이다. 이러한 음악들은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감각적이 되고 기교도 늘어나게 되어 있는데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다. 대중 음악은 육신적인 음악이다. 에릭 바걸은 그의 책 'From Rock to Rock'에서 록 음악의 성격을 ①반역 ②폭력 ③허무주의, 절망 ④도피주의 ⑤마약, 술 ⑥성 ⑦자살, 살인 ⑧신비주의 ⑨사탄 숭배 ⑩하나님, 예수님 모독 10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뉴에이지 운동은 반
성경적이고, 적그리스도 적으로서 세상의 평화와 자신이 자신을 구원하는 자율적 구원이다. 그들은 구원에
이르기 위한 명상을 중요시 하는데 이것을 도와주는 음악이 뉴에이지 음악이다. 이 음악의 특징은 단순한
음형의 계속되는 반복인데 결국 원적이고 윤회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은 시작부터 18세기까지는 교회음악이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음악은 18세기 고전주의 음악 이후 음악의 아름다움이 목적이 되었다.그 후 낭만주의 음악은 어두움의 세력이 감미로운 선율에 실려서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고 허무주의적인 삶으로 이끌어 간다. 20세기 음악은 이러한 허무주의가 이어져 온 경우도 있고 파괴주의적인 일면도 보인다. 결국 클래식 음악도 결코 복음주의 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음악들이 무엇이 이롭고 해로운지 잘 알아야 한다. 그러나 너무 과민하게 반응 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데 신경을 써야 한다.

12장 의인의 찬송

하박국은 BC 600년 경 남 왕국 유다에서 활동하던 선지자 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종인 동시에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던 음악의 종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백성답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하며 기도하였다. 그 기도에 대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징계하는데 이방인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이 악인을 방관하는데 대해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이에 대한 답을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라고 대답해 주신다. 결국 그는 의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의인의 찬송은 어떤 찬송일까? 첫째, 의인의 찬송은 영적 투쟁의 찬송이다. 둘째, 의인의 찬송은 믿음의 찬송이다. 마지막으로 의인의 찬송은 절대적 기쁨의 찬송이다.

최혁 목사님의 예배관련 저서
-나의 찬송을 부르라
-찬양리더
-참으로 예배하는 자 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