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새로운 만남

예수님은 예배 속에서 탄생하셨다. 그의 모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을 깨달았을 때에 그녀는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렸다.(눅1:46 이하)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가 시작되던 때에 모태에서부터 그는 예배의 분위기 속에 있었고, 탄생했을 때에도 천사들에 둘러싸여 예배와 찬양 속에 있었다.(눅2:13∼14)

그 뿐 아니라 교회가 탄생할 때에도 찬양과 경배로 가득 찬 예배가 있었다. 행2:1 이후에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6주 동안의 성경공부와 10일 동안의 기도 모임이 계속되는 동안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큰 기대감 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큰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였다. 그들은 불의 혀 같은 것을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으며 한번도 배우지 않은 것을 말하고 행하였는데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교회 안에서 뿐만아니라 교회 밖으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초대교회는 예배 속에서 탄생했다. 행2:14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 때에도 찬양과 말씀이 있은 후에 계속적인 부흥과 함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구약의 시편을 제외하고 예배에 대해 가장 많이 언급하는 요한계시록에서도 요한은 휘장이 열리고 하늘의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와 같이 천국은 예배 속에 존재한다. 예수님의 탄생 때에도, 교회가 처음 태동할 때에도, 그리고 이러한 교회가 나아가는 영혼의 세계에도 동일하게 예배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예배는 최상의 명령>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가장 참다운 인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동물도 먹고, 자고, 자라고, 결국 죽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사람과 같다. 그러나 결코 동물들은 예배드리지 않는다. 예배는 오직 인간들만이 할 수 있는 실천적인 행동이다. 인간의 제일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데 있다. 우리가 태어난 것은 하나님께 반응하고 예배드리고 그분을 인정하고 찬양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인간실제에 있어서 예배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또한 예배는 단지 건물 안에만 종속된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 관여하며, 주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 전체에 퍼져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경건 생활과 예배행위는 서로 연관성을 가지는 것이다.

예배드리는 것과 기타나 피아노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실제로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예배의 가장 엄밀한 본질에 있어서는 손을 들든지 내리든지, 눈을 뜨든지 감든지, 몸을 굽히든지 펴든지, 무릎을 꿇든지 펴든지 하는 것이 별의미가 없다. 물론 이런 수단들이 예배의 어떤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외적인 것들은 단순히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을 표현하는 도구나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전인격적 예배>

윌리엄 템플은 "예배란 우리의 전존재를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며 우리의 전인격이 예배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정의하였다. 예배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우리의 양심을 깨우게 되고 이 양심은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 우리가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진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풍성케하고, 우리의 이성적인 사고와 생각을 예배에 포함시킨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으로 우리의 상상을 정화시키며 우리의 생각과 개념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심령은 예배 가운데 감정과 느낌으로 영향을 받는다. 예배는 이런 감정 이상의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이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우리가 예배 중에 우리의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않된다. 물론 한쪽으로 편향된 예배를 드려서는 안되며,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목적'위에 '우리의 의지'를 내려놓는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의 5가지 인격적 요소(양심, 생각, 상상, 정서, 의지)가 예배에 포함됨으로 우리의 전체적인 온전함이 하나로 묶여져서 하나님 앞에 드려지게 된다.


<예배의 두가지 요소>

1)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
예배는 새로운 곡조나 노래를 익히고 배우는 등의 외적인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우리는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살아있는 관계를 맺게되고 우리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의 4가지 진리를 가르쳐 주여야 한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이고, 두 번째로 이러한 계획과 사랑을 방해하는 유일한 것은 죄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우리가 노력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도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이것을 미리 아셨고 해결하기 위해 아들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심으로 우리의 주와 구주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들은 인간의 의무를 먼저 가르치고 인간편의 행위를 통해 신에게 용납된다고 말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이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그에게 화목하도록 만드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먼저 일하시고 난 후에 우리가 행할 바를 알게 하셨고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 하셨으며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의 것으로 가져가셨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로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해야할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일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며 공로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그냥 받는 선물인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셨다. 따라서 예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이다.

2)인간의 반응(Response)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대한 결과로써의 반응. 이것이 예배의 중심이다. 그리고 예배의 시발점과 핵심은 하나님이시다. 시150:2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과 그의 광대함을 좇아 찬양하였다.

우리는 예배의 2가지 요인에 의해 자극을 받게 되는데 그 하나는 하나님이 행하신 능하신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속성인 광대하심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예배에 자극을 받게 되고 하나님께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게 된다. 이것이 예배의 핵심이다. 예배인도자의 입장에서 회중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보게 하고 '하나님의 신분과 본질적인 속성인 성품'을 깨닫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때대로 이 둘 중에 무엇이 우선적인 것인가에 대해 토론을 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시고 그런 일을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시다.'라고 연결지어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반응은 때로는 자발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기다리며 그 충만함을 즐거워하고 그 안에서 축복과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보호하심을 느낀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넘치는 기쁨으로 경배를 드린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우리의 예배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지지 못하고 억지로 희생적으로 드려지게 되며 마음의 준비 없이 예배에 나오게 되기도 한다. 우리가 처한 상황 때문에 불만과 불평을 드러내기도 하고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과 사랑하시는 것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나올 때도 있다. 또한 예배의 필요 자체에 대해서까지 회의와 의심을 가게 된다. 그러나 합3:17∼18을 통하여 우리는 소출이 없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과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가난에 처할지라도 단지 하나님 한 분만으로 인해 기뻐하였던 하박국의 고백을 듣게 된다. 그는 상황이 불리하고 마음이 공허해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함으로 희생적인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다. 환경과 마음의 어려움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았을 때에도 단순히 기도하고, 말씀 들을 것을 선택하여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경배'와 '찬양'의 차이

우리는 여기서 '경배'(Worship)와 '찬양'(Praise)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경배란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인정'할 때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경배를 드리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머리를 숙이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것이 바로 경배이다. 찬양은 우리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다.

마치 우리의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으로, 몸을 표현한다면 손을 들어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찬양은 하나님이 행하신 것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반응하는 것보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그분의 성품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훨씬 어려움을 느낀다. 이와 같이 경배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찬양드리는 것보다 어렵다. 우리는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혹은 희생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게 되며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응답이다.


하나님의 응답

우리의 응답의 반대편에서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신자의 예배를 받으실 대상으로 언제든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기 위해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다. 구약과 신약의 여기저기에 이런 특별한 임재가 나오는데 몇 가지 구약의 예를 살펴보면 대하 15:1, 20:14, 24:20에서 아사랴와 야하시아와 사가랴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임하심을 볼 수 있다. 삿3:10, 6:34, 11:29, 13:25에서도 하나님은 사사들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임하셨고 삼상 16:!3에서는 다윗에게, 그리고 대선지서인 에스겔서에서도 여러 가지 모양과 상황으로 특별하게 임하셨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믿는 신자에게 언제나 늘 함께 하시지만 이렇게 특별하게 임하시는 경우도 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하늘을 우러러 보셨을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으며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눅3:21∼22) 이 사건이 있기 전에는 그의 공생애의 사역과 이적이 시작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런 임재 이후에 예수님은 능력과 기사로 이 모든 사역을 감당하셨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성부, 성령 하나님께서 특별히 임하셨던 것이다.(행7:54∼56)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 집사에게도 동일하게 임하셨는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드릴 때 하나님이 특별한 방법으로 그에게 임하셨던 것이다. 행 4:31에서도 성도들이 기도하기를 마친 후에 성령이 강하게 임하셨고 또한 그들로 복음을 능력있게 증거하도록 하셨다. 그들이 하나님께 경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발할 때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특별한 방법으로 임하셨던 것이다.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에도 성령이 무리 가운데 임하셨음을 보게 된다.(행10:44)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인정하며 반응하게 되는데 그때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특별하게 임하시고 이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며 우리의 반응은 더욱 활성화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가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 행하신 일이 어떠한가로 인해 예배로 반응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5가지의 전인격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대해 온전히 반응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조화되어 우리의 감정 가운데 가장 이타적인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교회 예배의 다섯가지 원리

1)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주 우리는 예배를 회중이 느끼는 느낌에 의존하여 드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드려져서는 안된다. 우리의 관심은 우리가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예배를 어떻게 보시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게 무엇을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며 어떻게 하나님게 영광을 돌려 드리냐 하는 것이다. 우리 예배의 주된 관심사는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즐기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냐 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몸의 본질적인 연합을 드러내야 한다.
예배가 산발적으로 나뉘어져 개인별로 드려질 때 우리는 예배 가운데 각기 취향에 따라 다른 악기와 찬양과 행위를 원하므로 쪼개진 마음과 갈라진 예배를 드리게 된다. 이 모든 요소들이 예배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흐트러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실들을 아파하시며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우리가 다양함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기를 원하신다.

3) 성령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으면서도 질서와 규율을 지켜야 한다.
때때로 우리는 너무 엄격한 질서로 인해 예배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기도 하며 너무 지나친 자유가 예배의 질서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두가지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가길 원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 안에서 구조적인 회복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예배를 위한 구조는 때에 다라 고쳐져야 하며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 구조를 바꾸실 수 있도록 여유공간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전통과 환경 안에서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 회중 개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므로 예배가 무질서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따라서 예배가운데 질서와 균형을 이루어 가는 일은 무척 중요한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예배인도자가 필요하다. 그는 예배 안에서 내용과 질서가 조화를 이루도록 도우며 균형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4)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은사들-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을 표현할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특별히 고전 14:26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예배드리기 위하여 모일 때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그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와 방언과 통역하는 것도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예배 중에 함께 있되 이들은 서로 덕을 세우기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 자기교만, 자기탐욕, 자기 집중적인 목적으로가 아니라 교회를 활성화시키고 새롭게 하며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예배 중에 이러한 다양한 은사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좋다. 고전 14:27∼34을 살펴보면 예배에 이러한 성령의 은사 뿐 아니라 일반적인 은사가 어떻게 실제 예배 가운데 적용되는지 말해주고 있다.

5)온 교회가 믿음의 깊이에 이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하나님이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시고, 또 성령이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에 집중하는 것이 예배드리려는 동기를 자극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예배의 순환 속에서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도록 도우신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행하길 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깨달았을 때 우리마음속의 두려움과 공포심이 사라지게 된다. 경외심이 아닌 두려움은 때때로 우리를 좌절과 침체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와 실제로 함께 계심을 깨닫게 될 때 그런 두려움은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즐거워함으로 감당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예배의 원리를 오늘날까지 적용함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신약에 나타난 예배의 요소
유대인들에게는 찬양을 뜻하는 세가지 단어가 있었다.

1)할랄(HALAL)-"소리를 발하다"
여기서 소리라는 단어의 뜻은 자기중심, 자기도취 그리고 이기적인 동기에서 무질서하게 소리를 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들을 수 있는 어떤 소리로 표현하여 예배드리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때때로 예배나 묵상 중에 조용히 깊이 상고함으로 마음속의 통찰력을 구하기도 하지만 침묵과 함께 보완적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소리로 표현하여 드리는 것이다.

2) 자말(ZAMAR)-"악기를 연주하다"
시150:3∼6에서 우리는 다양한 악기가 동원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게 된다. 최초의 기독교 예배는 유대교 예배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20세기를 사는 우리가 이러한 악기를 동일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이제껏 우리의 전통적인 예배의 관습을 깨게 만드는 결과가 되며 따라서 종종 성경과 우리의 전통 사이에는 모순되는 상황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예배의 주된 관심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느냐 하는 것이다.

3) 야다(YADA)-"몸을 흔들다"
성경은 명확하게 우리가 예배중에 우리의 몸을 움직여 예배드리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예배시간에 경배와 찬양의 표현으로 머리를 들어 눈을 하늘로 향하는 모습, 머리를 숙이고 겸손함으로 회개하는 모습, 눈을 밝히 떠 자연을 가까이 대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모습, 손을 들어 보임으로 우리의 전인격을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모습, 하나님을 인정하는 표현으로 무릎을 꿇는 모습, 발로 우리의 기쁨을 표현하는 모습 등 이 모든 행동을 야다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유대교 예배의 특징이다. 초대교회의 예배가 시작될 때에도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것을 다른 지역으로 전파하였다. 그러나 이런 예배의 특징을 현대의 예배에 적용시키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짐 그래함(Jim Graham)/ 전 영국 골든힐 침례교회의 담임목사이며, 케즈윅 사경회, 스프링 하비스트 등의 주강사로 널리 알려진 설교자이며 그가 쓴 많은 책중 「잠자는 거인을 깨운다」,「기도」등의 저서가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