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은 온 세상을 점령할 것 같은 기세로 확장되어 나갔다. 승리할 때마다 많은 노예들을 잡아 로마로 데려왔다. 로마제국이 멸망할 무렵 로마에 노예로 있는 사람들은 자유시민보다 4배나 많았다. 별별 노예들이 다 있었다. 먹고 또 먹고 배가 부른 주인을 토하게 해주는 노예까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들은 주인의 물건이요, 노리개였다.

  기독교가 전파되어 노예들에게도 복음이 들어갔다. 그들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동등한 존재임을 배웠다. 어떤 때는 그들의 주인들도 신자가 되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집에서는 주종관계지만 교회에서는 한 형제와 자매가 된 것이다. 이때 노예들은 주인과 묘한 관계가 된다. 주인과 맛 먹으려는 노예들도 생기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되면 사회가 무질서하고, 혼란하게 된다. 베드로는 크리스천이 된 노예(사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Slaves, submit yourselves to your masters."(베드로전서 2:18)    

  베드로 사도는 노예들에게 순복하라고 말한다. 잘해주는 주인에게뿐 아니라 잘 못하는 주인에게도 순복하라고 말한다. 부당하게 일시키는 주인, 욕을 하며 인격적 모욕을 하는 주인, 영주권 없다고 수시로 주급 떼어먹는 주인... 이런 주인들에게 순복하라고?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을까? 어떻게 그들에게 순복할 수 있을까? 베드로는 그들에게 몇 가지 지침을 준다.

  첫째,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베드로전서2:19). 순복할 수 있는 이유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의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다. 나를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지금은 힘들지만 곧 정금으로 뽑으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둘째,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1). 크리스천들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안다. 이 고난은 모든 신자들의 '본'이다. 여기 '본'이라는 말의 원 뜻은 글자 연습하는 penmanship같은 것, 붓글씨 교본 같은 것을 말한다. 즉 일점일획도 빈틈없이 따라야 하는 모본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신자가 정확하게 따라야한 모본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고난 뒤에는 부활이라는 엄청난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일반적인 세상의 방법은 잘못된 주인에게 대항하고, 따져야 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부르죠아 계급을 경멸한다. 즉 주인들은 선하건 악하건 숙청대상으로 생각했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어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분배해야 공평하고 합리적인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70년 만에 망했다. 기독교는 주인에게 순복해서 망했는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장수하는 단체, 그들 중에서도 점점 강해지는 단체가 되었다. 역사적으로도 강경파, 혁명파는 빨리 망했다는 것이 통계다. 보수파, 온건파가 항상 오래간다. 여기에 인생사는 지혜가 있다.

  고난의 본을 즐겁게 따르라. 고난을 요리조리 피하는 뺀질이가 성공하는 법은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셨다. 그 문이 생명의 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민생활, 너무 편하게 살려고 애쓰지 마라. 남이 나보다 잘 사는 것을 보며 부러워하고, 안달하지 마라. 너무 편한 것 보다 좀 불편하게 사는 게 정신적, 영적으로 건강하다. 자녀들에게도 모든 것을 편하게 해 주는 것, 모든 것을 다 갖게 해주는 것,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는 것은 그들을 망치게 하는 지름길이다. 좀 불편하게 사는 연습을 지금부터 시키라.

  고난을 벗하여 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 안에서의 고난은 반드시 보상이 있다. 유명한 영국 속담이 여기서 나왔다. No Cross, No Crown!

-포도나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