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 헨릭슨은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한 건축설계사였다. 캠퍼스에서 네비게토를 만나 성경공부를 하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그 후 자신도 젊은이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했다. 어느 날 그는 건물을 설계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집이 언젠가는 무너질 집인데...' 그는 무너질 집을 이렇게 공들여서 열심히 설계하는 자신을 보면서 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영원한 집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하고 그의 인생을 젊은이들을 위한 평신도 사역에 헌신하였다. 그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안수 받은 목사도 아니지만 전도와 양육의 열매가 풍성했다. 그가 쓴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Disciple are made, not born'은 제자훈련 사역의 고전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직분에 대한 긍지가 있었다. "우리가 이 직분 ministry을 받아 긍휼 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고후4:1). 바울은 이 직분을 자기 직업(천막 만드는 일)보다 귀하게 여겼다. 아니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이 직분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내가 살고, 남이 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었다.

사역자는 사람 살리는 이 직분이 세상 어떤 일 보다도 귀한 일이라는 믿음이 있어야한다. 내 작품을 만드는 일보다, 책을 쓰는 일보다, 학위를 받는 일 보다.... 그렇지만 이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다. 고난이 따른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 사도 바울의 일행은 생명의 말씀을 전하면서 답답한 일을 많이 당했다. 왜 하나님 일 하는데 그런 고난이 있지? 하나님 일하는데 하나님이 돌봐주시지 않나? '이 세상 신'(4)이 있기 때문이다 '망하는 자들'(3)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사단마귀가 아직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에 살리는 사역을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사단마귀와 대적하며 사역하길 바라신다(약4:7) 힘은 대적할 때 생기기 때문이다.

직분을 받은 사역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난을 요리조리 피해선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고상하게 살려는 사람에게 생명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 죽인 것' ('예수의 죽음'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이해하기 편하다. NIV 'carry around the death of Jesus')을 짊어져야 한다. 고난을 몸으로 받아야 한다. 항상! 그때 사는 역사가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