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책은 성경이다. 성경이 아니면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로 인도 받을 수 없다. 즉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에게 성경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성경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긴다.    

  성경 말씀은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되는가? 해석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처한 환경이 다르다. 전문적인 말로 바꾸면 성경 본문을 text라고 말하고 내가 처한 환경과 나의 개인적 경험을 context라고 한다. text 는 context 안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진다.

  성경의 일차적 해석은 문자적 해석이 기본이다. 그러나 모든 구절의 문자적 해석이 우리 삶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야곱은 네 부인을 통해서 열두 아들을 낳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부인을 네 명 가져야 하는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세 부인에게서 아들들을 얻었다고 지금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는가? '성경적'이라는 말은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어떤 분이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더니 목사님들이 입는 검정 까운은 성경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계시록을 보니까 검정색은 죽음의 색깔이라는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제사장의 복장은 청색이므로 목사님들의 까운도 청색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제사장이 쓰는 모자도 쓰고 흉배도 부치고 설교해야 하지 않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자 성도들에게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라고 말한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고전11:5) 그러나 남자들은 그 반대다.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고전11:4). 왜 이런 말씀을 하는가? 본래 유대인들은 남자나 여자나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했다. '탈릿'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린도에는 상황이 달랐다. 남자들이 무엇을 쓰고 다니면 이교도였다. 여자들이 머리를 보이고 다니면 창녀나 동성애자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숙한 여인들은 밖에 다닐 때는 머리에 무엇을 쓰고 다녔다. 남바위라고 하는가? 그러나 현재 고린도 시나, 우리나라에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그 시대의 상황, 그 지역의 상황(context)를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하게 성경을 적용하면서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엉뚱한 해석을 절대적으로 믿을 때 독단이 되고, 이단이 된다. 이러한 잘못을 범치 않기 위해서 해야할 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그 시대 상황을 조금이라도 아는 것, 또 하나는 열심히 기도해서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는 것이다. 공부하는 것을 무시하면 성경의 context를 이해하지 못한다. 기도를 하지 않고 성경을 보면 text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