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에 독일에서 공부할 때 저는 페터라는 독일 학생과 한 방을 쓰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서를 공부하면서 꽤 은혜를 받는 것 같던 페터는 어느 날 성경을 더 이상 공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는 그 당시 독일 학생들 가운데 독버섯처럼 퍼져나가던 뉴에이지 운동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페터는 내 앞에서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명상 훈련을 시범해 보였습니다. 마치 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더니 명상을 도와준다는 음악을 틀었습니다. 그 음악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헨델의 '라르고'라는 음악이었습니다. 또 그리그의 페르퀸트 조곡 중에 나오는 '아침'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 곡들은 매우 조용하고 명상적이기 때문에 그 당시 뉴에이져들에게 인기곡 이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뉴에이지의 음악과 뉴에이지 풍의 음악을 구별할 수 있어야합니다. 뉴에이지의 음악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입니다. 반 기독교적이요, 적 그리스도 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 가치관을 인정하고, 믿고 그 음악을 듣는다면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뉴에이지 풍의 음악은 그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뉴에이지 풍의 음악이란 시끄러운 헤비메탈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음악입니다. 그러므로 악기 사용이 소박하고, 소리가 부드럽고, 반복을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경향의 음악을 모두 뉴에이지 음악으로 몰아 부치는 것은 70년대에 북한이라고 말만 사용해도('북괴'라고 해야하는데) 빨갱이처럼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만약 뉴에이지 풍의 음악은 사용해도 안되고 들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의 2악장은 모두 들어서는 안될 음악일지도 모릅니다. 2악장은 대게 느리고 명상적이기 때문입니다. 헨델의 '라르고'나 비발디의 '사계'는 뉴에이지 음악이 아닙니다. '사계'의 작곡자 비발디는 천주교 신부입니다. 그러나 뉴에이져가 자신의 목적으로 그런 음악들을 사용할 경우는 뉴에이지의 음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뉴에이지의 음악을 하나님 찬양하는데 빼앗아 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교회 음악을 연구해 보면 구약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음악에 하나님 찬양의 가사를 부쳐 사용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용하는 방법을 콘트라팍타 (Kontrafaktur)라고 합니다.

뉴에이지의 음악은 이제 대중음악의 한 장르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지만 대부분 종교적인 이유에서 그 음악을 듣고 있지는 않습니다. 마치 콜라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좀더 부드러운 스내플(Snapples)을 좋아하듯 시끄러운 롹 음악에 물린 사람들이 조용한 음악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뉴에이지 음악은 음악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구태여 뉴에이지의 음악에 심취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모르고 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큰 죄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사탄의 마수에 걸린 것인 양 너무 두려워하지는 마십시오. 중요한 건 내가 복음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는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 어떤 문화도 능가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복음으로 충만한 사람은 어떤 문화에 접하여도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에게 제사 드린 음식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고전10:24-25)

세상 모든 문화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단 마귀에게 빼앗긴 모든 세상의 문화를 다시 하나님 찬양의 도구로 만드는 일에 당신이 일익을 담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