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제 아들 윤석이가 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저는 윤석이랑 노는 걸 좋아합니다. 저녁때 집에 가서 이 녀석과 뒹굴 생각을 하면 다른 일을 하다가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어느 날 저녁 집에 들어갔는데 윤석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다리가 다쳐서 아프다는 것입니다. 저는 빙긋 웃으며 "윤석아, 지금은 아빠랑 노는 시간이니까 그런 건 다 잊어버려라. 자, 여기 공 있으니까 놀자."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아니지요. 저는 깜짝 놀라서 윤석이의 아픈 다리를 보면서 약을 바르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하여 얼마 전 찬양 인도를 잘하시는 K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고민하던 한가지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분은 예배에 있어서 치유 사역을 못마땅하게 여기셨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깨끗하게 올려드려야 하는 것인데 요즘에는 예배 중에 치유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건 예배의 목적을 불순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주의해야합니다."

저는 예배가 하나님께 순수하게 드려져야 한다는 데는 전혀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처 입은 심령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실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마음의 상처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자도 상황은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는 이 상처를 감추며 가장 은혜 받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마음이 아파서 속으로 울고 있는 사람에게 '면류관 드리세'의 찬양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합니다. 목사의 '나가서 전도해야 합니다' 의 설교는 무의미하게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들 앞에서 폼잡고 설교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저들의 병을 치료해주셨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치료 사역으로 가득해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치유는 교제 이전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치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대 예배는 치유를 중요시 여기고 있습니다.

여기에 관심을 갖고 인터넷에서 Worship & Healing이라는 항목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3만여 이상의 사이트가 이미 개설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의 예배는 치유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와 같은 치유의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치유의 메시지가 있어야 합니다. 치유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병든 죄인을 부르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막 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