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황제 때 단발령이 내린 적이 있습니다. 상투를 잘라 버리라는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일도 아닌데 그 당시에는 매우 충격적인 명령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당시에 수지발부모를 외치며 자신의 상투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은 부모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절대 자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목숨은 버려도 된다는 말인가요?

얼마 전 바티칸에서 발표한 내용이 저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카톨릭 교회만이 유일한 교회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교회와는 기독교 교회로 함께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교황만이 베드로를 이은 하나님의 유일한 대리인이며 교황이 함께 하는 교회만이 이 지상의 유일한 정통 교회라는 것입니다. 한동안 에큐메니칼 운동을 벌이다가 새 천년에 들어서서 이런 주장을 공식적으로 펼지는 카톨릭의 저의가 무엇인지.

위의 두 사건은 본질과 비본질을 착각한 결과입니다. 본질과 비본질을 혼동하면 우스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십자가의 도가 본질입니다. 이것은 절대 변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비본질적 요소는 바뀌어도 됩니다. 아니, 시대에 맞게 바뀌는 것이 더 좋습니다. 교회에서 전통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이 교회의 본질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교회는 그때부터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본질이 변질됩니다. 신앙은 하나의 형식으로 전락합니다. 실제로 카톨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구원관에서 이미 멀어졌습니다. 삼위일체에 마리아를 첨가한 사위일체를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웨버(Robert Webber) 박사의 정의에 의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본질입니다. 이 본질적인 요소는 모든 예배에서 변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그 외의 요소들은 변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희생제사로부터 초대교회, 중세시대, 개혁교회를 거처 현대의 예배에 이르기까지 예배의 방법과 찬양의 방법은 다양하게 변해왔습니다. 이러한 비본질적 요소의 변화가 예배의 본질을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의 찬양경배는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를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현대의 문화를 적극 이용한 예배입니다. 찬양리더는 예배의 본질적 요소가 무엇인지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합니다.